부처, 혹은 고타마 붓다나 석가모니불로 알려진 부처님은 고대 인도의 위대하고 비범한 영적 스승이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경에 싯다르타 고타마 왕자로 태어나서 왕국의 거대한 부를 자연히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어느 날 왕자는 영적 깨달음을 찾아 왕궁을 떠났습니다. 부처님은 몇 년간의 명상 수행 후 보리수 아래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후 부처님은 다른 중생에게 생사윤회의 굴레에서 해탈하는 법을 가르치며 수행의 공덕을 나눴습니다. 보편적 진리에 관한 부처님의 영적 가르침은 귀한 보물이며, 오늘날까지 그 깊은 지혜와 자비심을 배우며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대반열반경, 혹은 열반경은 대승 불교의 여래장경이며 주요 대승 경전으로 여겨집니다. 원본이 만들어진 실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초기 경전은 2세기 이전이나 2세기 중에 쓰였다고 합니다. 이 경전의 완전한 원본인 산스크리트어 문헌은 소수의 단편만 남고 사라졌지만 중국어와 티베트어 번역본은 남아있습니다.
이 경전을 416년에 법현이, 421년에 담무참이 중국어로 두 번 번역하였습니다. 번역본은 실제로 다른 두 개의 문헌에서 나온 것이며, 차이점은 불성에 대한 가르침에 있습니다.
담무참의 번역본은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명시했지만 법현의 번역본은 어떤 존재는 절대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담무참의 번역본이 동아시아에서 더 인기가 있으며, 동아시아 불교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5장. 달의 비유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비유컨대, 마치 사람이 달이 뜨지 않음을 보고는 달이 없어졌다고 말하면서 없어졌다는 생각을 하지만 달의 성품은 참으로 없어진 것이 아니니라. 다른 지방에 달이 뜰 때 그 지방 중생들이 달이 떴다고 하지만 달의 성품은 참으로 나는 일이 없노라. 왜냐하면 수미산이 가려서 나타나지 못할지언정 달은 항상 있는 것이어서 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아니니라.
여래, 응공(마땅히 공양할 분), 정변지(완전히 깨달은 분)도 이와 같으니라. 여래가 삼천대천세계에 나타나거나, 혹 염부제에서 부모를 가지게 되면 중생들은 말하기를 염부제에 나셨다 한다. 여래의 성품은 진실로 열반이 없지만 중생들은 모두 여래가 참으로 열반에 들었다 함이 비유컨대 달이 없어졌다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여래의 성품은 나고 없어짐이 없건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났다 없어졌다 하는 듯이 보이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여기서 보름달일 적에는 다른 곳에서는 반달을 보고, 여기서 반달일 적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름달을 보느니라. 염부제의 중생이 초승달을 보고는 모두 초하루다 하여 새로운 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달이 둥글어진 것을 보고는 보름이라 하여 보름달이란 생각을 냄과 같으니, 달의 성품은 이지러지거나 둥글어지는 일이 없고 수미산으로 인하여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여래도 그와 같아서 염부제에서 혹 처음 나는 것을 보이기도 하고, 혹 열반에 드는 걸 보이기도 하니, 처음 나는 것은 초하루 달과 같아서 모든 사람이 아기가 처음 났다 하고, 일곱 걸음을 걷는 것은 초이틀 달과 같고, 혹 글방에 들어가는 것은 초사흘 달과 같고, 출가함을 나타내는 것은 여드레 달과 같고, 미묘한 지혜의 광명을 놓아 한량없는 중생의 마군을 깨뜨리는 것은 보름달과 같으며, 혹 32상과 80종호를 나타내어 스스로 장엄하다가 열반을 나타내는 것은 월식함과 같거든, 중생들의 보는 것이 한결같지 아니하여 혹은 반달로 보고 혹은 보름달로 보고 혹은 월식으로 보지만, 달의 성품은 진실로 늘고 줄고 월식 되는 일이 없고, 언제나 둥근 달인 것같이, 여래의 몸도 그와 같으므로 항상 머물러 있고 변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마치 보름달이 모든 곳에 비칠 적에, 간 데마다 도시나 시골에나 산, 구렁, 강물, 우물, 못, 물그릇에 모두 나타나거든, 모든 중생이 백 유순이나 백천 유순 길을 갈 적에 달이 항상 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허망한 억측을 내어 말하기를, 「내가 본래 아무 도시의 집에서 이 달을 보았는데 이제 이 못에서도 보니 이것이 본래 보던 달인가, 그 달과 다른 달인가」하여 제각기 생각을 달리하며 달의 형상이 크고 작은 것도, 혹은 솥과 같다 하고 혹은 수레바퀴와 같다 하고, 혹은 49유순과 같다 하며 모든 사람이 달의 광명을 보지만, 혹은 둥글기가 쟁반과 같다 하노라. 달은 본래 하나이건만 여러 중생이 제각기 달리 보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여래도 그러하여 세상에 나타나거든 어떤 하늘 사람이나 세상 사람은 여래가 지금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귀머거리나 벙어리는 여래를 볼 적에 귀머거리나 벙어리 같다고 하며, 여러 중생의 말과 음성이 제각기 다르거든 모두 생각하기를 여래가 자기네 말과 같은 말을 한다고 하며, 또 각각 자기의 집에 와서 자기네의 공양을 받는다고 하며, 어떤 중생은 여래의 몸이 엄청나게 크다고 보기도 하고 대단히 작다고 보기도 하며, 어떤 이는 여래가 성문의 모양이라 보고, 혹은 연각의 모양이라 보며, 또 외도들은 여래가 지금 자기네의 도에 들어와서 도를 배운다 생각하고, 어떤 중생은 여래가 자기를 위하여 세상에 났다고 생각하느니라.
여래의 참 성품은 달과 같아서 곧 법신이며 나고 없어짐이 없는 몸이건만, 방편으로 나타내는 몸이 세상을 따르느라고 한량없는 본래 업의 인연을 보이는 것이어서, 간 데마다 태어나는 줄로 보임이 저 달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머물러서 변함이 없다고 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라후라 아수라왕이 손으로 달을 가리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월식한다 하거니와, 아수라왕은 실로 월식할 수가 없고 아수라가 달의 광명을 막는 연고이며, 달은 둥글어서 이지러지는 것이 아니지만 손으로 가려서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니라. 만일 손을 떼면 세상 사람들은 달이 도로 소생하였다 하면서 달이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말하느니라.
가령 백천 명의 아수라왕이라도 괴롭게 할 수가 없으니라. 여래도 그러하여, 어떤 중생이 여래의 있는 곳에서 나쁜 마음을 내어 부처님 몸에 피를 내며 5역죄를 짓거나 일천제가 되는 것을 보임은, 오는 세상의 중생들을 위해서 이처럼 승가를 깨뜨리며 법을 끊기게 하여 난처한 일을 보이거니와, 한량없는 백천 마군이라도 여래의 몸에 피를 낼 수가 없으니라.
왜냐하면 여래의 몸은 피나 살이나 힘줄이나 골수가 없으며, 여래는 진실하여 괴롭거나 파괴됨이 없노라. 중생들은 모두 말하기를, 교법과 승가가 파괴되고 여래가 없어진다고 하거니와, 여래의 성품은 진실하여 변함이 없고 파괴됨도 없건만 세상을 따르느라고 이렇게 나타내는 것이니라.
또 선남자야, 마치 두 사람이 싸울 적에 칼이나 몽둥이로 쳐서 피를 내며 죽게까지 하였더라도 죽이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였으면, 이런 죄업은 그리 중대하지 않은 것과 같이, 여래에 대하여 본래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으면, 비록 몸에 피를 내었더라도 그런 죄업은 가볍고 중대하지 아니하니, 여래도 그와 같아서, 오는 세상에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업의 과보를 보이는 것이니라.